나의 일상생활/나의 이야기

사월 초파일 봉암사를 찾아서

상영신 2014. 5. 6. 21:04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사월 초파일는 일반인의 출입을 허락한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봉암사 홈페이지 참조-

 

사촌 아우님과 봉암사에서 만나기로 해서 봉암사에 도착하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이다.

휴대폰은 불통이고 문자를 보내 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경내를 한 바퀴 돌면서 사진 몇장을 찍으니 벌써 점심 공양이란다.

비빕밥과 미역국을 맛있게 먹고 다시 경내를 둘러 본다 

 희양산과 구왕봉 모습

 옛길에 있는 일주문

 남훈루와 희양산

 대웅보전

 보림당(중앙), 극락전(우측)

 동방장(클릭)(2014.2.낙성식)  - 봉암사 수좌이신 적명 스님이 주석

 극락전(보물 제1574호)

▲ 극락전-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지증대사가 처음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18년(935) 정진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극락전 및 일주문만 남기고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극락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 중층 겹처마 모임지붕의 목탑식 건물이다. 신라의 마지막 경순황이 이곳에 피난하여 원당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이건물은 당초의 건물오 보기는 어려우나 기단 및 하층 처마는 특이한 구조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목탑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내부에 어필각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극락전과 산신각

 대웅보전

 대웅보전과 극락전

 

 연등과 남훈루 배면

 대웅보전

 삼층석탑(보물 169호)

▲ 삼층석탑-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다. 이탑의 조성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정상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3층 석탑의 균형 잡힌 모습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희양봉의 장중하고 힘찬 기상이 휘몰아쳐 내려오다가 삼층석탑에 이르면 마치 영웅의 기개도 단아한 우아함 앞에서는 그 수줍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용트림으로 뻗어오던 기개는 일순 탑 앞에서 주춤하며 부드럽게 순화되어 부드러움과 굳셈의 절묘한 조화로 찹배객의 발길을 묶는다.(참조-봉암사 홈피)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적조탑을 보호하기 위해 세움

 지증대사 적조탑비(보물 136호:고운 최치원의 글)

▲적조탑비-이 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적을 찬양한 부도탑비로 신라 경애왕 원년(서기 924년)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귀두는 한개의 뿔을 장식한 용머리 형으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석비이다.

비문은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분황사의 83세 혜강 노스님이 글을 쓰고 새겼다..비의 높이는 2.73m이고 너비는 1.64m이다.(참조-봉암사 홈피)

 뒷면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137호)

▲ 적조탑-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 9세기 경에 팔각원 단형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신 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되어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탑의 높이는 3.41m이고 지대석 너비는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전체적으로 장중하면서 당당한 모습에 그 앞에 서면 누구나 숙연해짐을 느낀다.(참조-봉암사 홈피)

 조사전

 금색전(클릭)-금색인을 모시는 집, 금색인은 부처님 

 태고선원(클릭)

 진공문(클릭)

 옥석대

 마애보살 좌상

▲마애보살좌상-이 불상은 환적의 찬 선사의 원불인데, 평소에 발원 기도하는 부처님 또는 보살이라고 전해오며 조각 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 닷집 혹은 집 모양의 장엄물 처럼 만들었으며 광배, 후광을 겸하는 듯하게 처리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 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어러한 형태는 고려말기의 양식과 서로 통하는 점이 많다.(참조-봉암사 홈피)

 가까이 본 마애보살 좌상

 희양산과 구왕보을 배경으로

봉암사 석종형 부도와  월봉스님 부도

 서암스님 부도

 환적당 스님 부도

함허당 스님 부도

정진대사 원오탑(보물제 171호)

▲정진대사 원오탑-이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신라시대 이래의 기본형인 팔각 원당형을 따른 묘탑이다.

전체의 구조는 지증대사 적조탑을 그대로 따랐으며,높이는 5m지대석 너비는 2.9m이다.



▼봉암사 월봉 토굴

 

 

 

<경향신문 2008.9.18(한국의 숲, 한국의 명산)에서 인용>

희양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에 우뚝 솟아 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중턱에서 정상쪽으로 암벽을 두르고 솟아 있어 마치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바위처럼 보인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인지 화강암 바위들로 이뤄진 해발 999m의 암봉은 멀리서 봐도 단단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기세다.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는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며 희양산 남쪽 너른 터에 봉암사를 창건, 선풍을 크게 떨쳤다.
봉암사 인근 계곡은 예로부터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불려왔다.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흐른다고 해서다. 20여리에 이르는 계곡에는 맑은 물줄기가 분재 같은 노송을 벗하며 넓은 암반 위를 힘차게 흘러내린다. 지증대사는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겹으로 띠처럼 되어 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며 경탄했다. 봉암사에서 산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면 가슴이 확 트이는 널따란 암반이 나타난다. 백운대다. 암반 위 집채만한 바위에는 마애보살좌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앞 너럭바위 위로는 차가운 계곡물이 세차게 흐른다. 금강산 만폭동에 견줄 만하다. 좌상 앞 반석을 돌로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

정상은 거대한 바윗덩이들로 이뤄졌다. 남쪽 봉암사가 자리한 봉암용곡 너머로 대야산, 속리산 줄기가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을 연결시키는 장성봉과 악희봉, 민주지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동북쪽으로는 백화산, 운달산, 주흘산 줄기가 막힘없이 펼쳐져 있어 장쾌하다.

정상 못미쳐 해발 928m 지점에는 희양산성이 있다. 신라와 후백제가 국경을 다투던 접전지로 치열했던 역사가 배어있다.
희양산에 서린 역사와 정기는 봉암사가 대변한다. 문경쪽에 있는 봉암사는 희양산의 가장 넓고 깊은 터에 자리잡았다. 신라 헌강왕 5년(879년)에 창건돼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뤘다. 근대 들어서는 저 유명한 ‘봉암 결사’가 이뤄진 한국 현대불교의 ‘탯자리’다. 해방 직후인 1947년 성철, 청담, 자운스님 등이 “부처의 법대로만 살아보자”며 용맹정진한 곳이다. 이 때부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이 기본 수칙이 됐다. 수행자들이 밭을 일구고 지쳐 선방에서 졸기라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 이놈들아!”하는 성철스님의 호통이 희양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1982년부터는 수행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봉암사는 물론 일대 사찰림의 일반인 출입을 금했다. 일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만 산문을 여는 ‘비밀 수도원’이 됐다. 이날도 경내만 개방될 뿐 산길을 밟지는 못한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하면서 고란초, 솔나리, 까막딱따구리, 원앙 등 온갖 희귀 동식물이 모여 사는 생태계의 보고가 됐다. 백두대간 일대의 산짐승들이 주변에서 총소리가 나면 희양산으로 달려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동식물들의 낙원이다. 2002년에는 봉암사 일대 2293㏊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됐다. 봉암사는 보물 등 지정문화재만 10점에 이르는 문화재의 보고이기도 하다.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를 새긴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제138호)는 1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거의 모든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다.

봉암사와 더 깊은 산골의 큰바위로 지붕을 삼은 월봉토굴, 용추토굴에서는 큰스님들이 ‘목숨을 건’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자연에 순응하는 뭇 생명의 낙원이면서 자연과 ‘법’을 거스르면 금방이라도 죽비와 함께 “밥값 내놓아라”는 호통은 감수해야 할 듯한 추상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산. 백두대간의 단전 부분에 위치한 희양산은 그런 모습이다.


희양산 산행을 하려면 충북 괴산군 연풍면 은티마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희양산 남쪽에 자리한 봉암사를 기점으로 생각하지만 봉암사가 있는 문경쪽에서는 오를 수가 없다. 일대가 봉암사 사찰림이고 조계종 특별수도원인 데다 산림유전자원보호림이어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은티마을에서 지름티재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밖에 없다. 정상부 암봉은 우회해서 오른다. 비탈이 가파르고 험한 데다 바윗길이 이어져 있어 조심해야 한다. 정상 부근에서도 봉암사가 있는 남쪽 방향은 곳곳이 막혀 있다. 왕복 4시간50분가량 걸린다.

스님들이 막고 있는 문경쪽으로는 갈 수도 없지만 아예 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등산로가 없어지다시피해 원시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새와 다람쥐는 자유로이 드나들어도 속인은 물론 일반 스님들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은 절집. 일년에 딱 한 번 산문을 여는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봉암사 답사를 하는 것도 좋다. 신라 경순왕이 잠시 피난왔을 때 원당으로 사용됐던 극락전과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 비문,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등 천년이 넘게 희양산과 봉암사를 지켜온 ‘보물’이 즐비하다. 동방 제일의 수행 도량에서 희양산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희양산 주변 문경시 가은읍에는 둘러볼 거리도 많다. 가은읍 소재지 쪽에 석탄박물관과 드라마 연개소문 오픈 세트장이 있다. 문경지역의 마지막 광업소였던 은성광업소 자리에 있는 석탄박물관은 폐광을 활용, 갱도 체험 등을 할 수 있도록 꾸며놓아 당시 탄광촌의 생활상 등을 실감할 수 있다. 인근에 철로자전거를 탈 수 있는 역도 있다. 조금 떨어진 완장리에는 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관이, 갈전리에는 견훤의 출생 설화가 얽혀있는 금하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