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09. 12. 6
장소 : 문경새재
모처럼 만에 집사람과의 나들이이다
10년 전부터 시작한 등산이다
흔한 산악회에 가입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집사람과 함께 등산하기를 5년
등산학교 졸업후 암벽등반으로 바뀌면서 집사람과의 동행은 어렵게 되었다
오늘도 천등산으로 릿지 산행을 가기로 했으나
갑짜기 추워진 날씨에 등반이 취소되기에 집사람과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다
모처럼 만에 함께하는 산행이 집사람도 싫지는 않은 눈치이다
골바람이 매우차다
주차장을 지나 생태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래전에 와본 생태공원은 약간의 변화가 있다
많지는 않지만 각종 동물들의 사육장은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하는 구관조와
도랑에서 다정히 헤엄치는 원앙새들의 모습이 발길은 멈추게한다
간밤에 내린 눈을 밟으면 옛 과거길를 지나 조곡관을 거쳐 주차장에 돌아오니
얼굴은 추위에 얼얼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 사적 제147호 문경 관문>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시대 영남 대로를 차단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제1·2·3관문 및 관문에서 좌우로 이어져 부속된 차단용의 성벽이다.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 1,106m)의 서쪽 계곡으로 넘어서 충주와 괴산의 연풍(延풍)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 천험의 요지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고, 관문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주흘산 동쪽의 하늘재가 주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고려시대 이후로는 새재(鳥嶺)가 보다 가까운 통로로 이용되고, 조선 초기에는 초점(草岾)이 이미 관방요해처(關防要害處)로 인식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주 사람 수문장 출신의 신충원(辛忠元)이 협곡처마다 약간의 시설을 하여 관방을 만들고, 이어 명군(明軍)이 관방을 강조하여 3관문 주변의 성벽이 축조되고 인근의 월악산에 겹으로 산성이 수축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서울의 방어를 위한 남방 제1의 관문으로 인식되어 1708년(숙종(肅宗)34)에 세운 가장 남쪽의 제 1관문인 초곡성(草谷城)에는 관문의 루각에 주흘관(主屹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협문 2개가 있는 누각은 팔작지붕으로,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虹霓門)과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가 설비되었고, 오른쪽에 커다란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다.
제 1관문에서 3km 정도 상류로 올라 제 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이 있다. 중성은 1594년(선조(宣祖)27)에 축성된 것이며, 제 2관문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좌우 협문이 3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또 숙종 때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소백산맥을 넘는 험로 중의 하나인 조령(鳥嶺)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제 3관문, 즉 조령관(鳥嶺關)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 협문 2개가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제 1관문 이외에 제 2·3관문은 허물어져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에 제 2관문을, 1977년에 제 3관문을 각각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은 적의 진로를 차단함에 있어 험준한 조령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미 적군이 쇄도한다하여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하여 조령에 대대적으로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해 오다가 숙종 때 비로소 3개의 관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세 관문의 성안에는 군사들의 진지(鎭址)·군창지(軍倉址) 등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경상 감사가 새로 부임할 때에 인장을 옛 감사와 교대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구정지(交龜亭址)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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