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생활/나의 이야기

늦가을 나들이(11.21)

상영신 2017. 11. 22. 13:32

잠시 일탈에서 벗어나 늦가을 나들이를 나선다.

옛 골목길이 아름다운 한개민속마을, 전국 최대규모의 태실지로 수양대군을 비롯한 세종의 18왕자와 왕손 단종의 태실이 안장된 세종대왕자태실, 조선 중기 학자 한강 정구 선생이 시를 지어 읊은 곳 무흘 구곡, 불령산 북쪽 기슭인 증산면 평촌리에 있으며 조계종 제8교구의 직지사 소속 말사로 편성되어 직지사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절 청암사를 둘러보고 노근리 양민학살 현장을 다녀온다.

늦가을인 탓에 하루 해가 짧음을 실감한다.


 ▼ 한개민속마을

성주 한개마을은 성산이씨가 대대로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촌락이다. 조선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이 곳에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었다. 현재는 월봉 이정현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며, 한옥 보존 마을이다.[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





 세종대왕자태실

 각 태실은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그 속에 태항(胎缸)과 태주(胎主)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誌石)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간석(竿石)·옥개(屋蓋)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어느 왕자의 태실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기단이 일석(一石)이고 간석·옥개도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기단면석부와 옥개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옥개 뒤에는 보주형(寶珠形) 꼭지를 조출(雕出)하였다. 이 곳 태봉(胎峯)은 뛰어난 명당으로 세종대왕의 왕자의 태실을 모아 봉안하였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


대갸천계곡(무흘게곡)

김천시 증산면에서 성주댐을 지나 고령 방면으로 이어지는 대가천계곡. 이 계곡은 한강 정구 선생이 남송 때의 주희가 노래한 <무이구곡>을 본받아 지은 <무흘구곡>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 기암괴석이 많고 맑은 물이 폭 넓은 계류를 이루어 피서철이면 야영객과 피서객으로 붐빈다.

백운정

제4곡 선바위

 청암사

858년(헌안왕 2)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혜철(惠哲)이 머물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의룡율사(義龍律師)가 중창하였고, 1647년(인조 25) 화재로 소실되자 벽암(碧巖)이 허정(虛靜)을 보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 4월 다시 불타자 환우(喚愚)와 대운(大運)이 20여년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34)경에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이어서 응운(應雲)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입적하자 대운(大雲)이 이를 받아서 완성하고 42수(手)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11년 9월에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전각이 불타자 대운이 1912년 봄에 다시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천정사와 월류정

이곳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한천팔경이라 일컫는 아름다운 절경을 음미하면서 서재를 짓고 글을 가르치던 곳으로 한천팔경은 사군봉, 월류봉, 산양벽, 용연대, 화현악, 청학굴, 법존암, 냉천정으로 이름 붙여진 금 오양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후세에 우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글을 가르치는 한천서원이 세우졌다가 고종초에 철폐된 후 유림들이 1910년 한천정사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근리평화공원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했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단면이다.
故 정은용 노근리희생자유족회장을 비롯해 노근리 사건 생존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그 상처의 현장은 이제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었다.
지난 2014년 9월에는 노근리평화공원에서 제8차 국제 컨퍼런스 및 총회가 열리는 등 노근리평화공원은 인권과 평화의 메카로 점점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에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전모와, 사건의 진실을 밝혀해 낸 과정을 전시하고 있는
평화기념관을 비롯해 평화와 인권에 대해 교육할 수 있는 교육관, 그리고 4만여 평에 이르는 아름다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노근리평화공원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