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히말라야 트레킹(2018)

11일차(1.18) 카트만두 ㅡ 팍딩

상영신 2018. 2. 17. 23:30

히말라야 트레킹(2018.1.8~1.31) 에베레스트 EBC 및 칼라파트라 트레킹

▼ 11일차(1.18) 카트만두 ㅡ SUMMIT항공 ㅡ 루크라 ㅡ 팍딩

 

2차 트레킹의 시작이다. 안나푸르나에서 하루를 비축하고 고소 적응이 되었다고 보고 이곳에서의 고소 적응일 2일을 절약하여 당초 코스를 변경 촐라패스를 넘어 고쿄를 거쳐 내려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여 2차 트레킹을 시작한다.

4시에 기상하여 5시10분 호텔을 출발하여 공항으로 이동한다. 루크라행 첫 비행기는 6시 45분 출발예정이였으나 공항에 낀 안개로 인하여 3시간 지연되어 9시 50분에 출발한다. 35분 정도 비행하여 루크라 공항(Tenzing-Hillary Airport)에는10시25분에 착륙한다.루크라의 Mountain View Lodge(2,840m)에서 점심(로스트 치킨, 감자, 야채)을 먹고 12시 28분 트레킹이 시작된다. 

팍딩(Phakding 2,610m)까지 7.7km를 Dudh Koshi Nadi를 좌측으로 두고 걷는다. 루크라 시내를 벗어나 고도를 서서히 낮추어 이동하므로 부담을 없다.

14시 37분 가트(Ghat)에 도착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한시간을 걸어 팍딩(Phakding)의 Trecker's Lodge에 도착(15시 20분)하여 1박을 한다.

 

4시에 기상하여 공항으로 이동하여 아침식사로 제공된 도시락 05:51
출발시간을 넘겨 기상으로 공항이 폐쇠되었다는 멘트 06:51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린다. 터미널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초초하게 정상운항을 기대한다. 앉을 의자 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승객이 대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2시간 반이 지나면서 공항은 정상운행으로 들어간다. 9시 50분 탑승을 완료하고 10시에 Summit Air을 이용하여 공항을 이륙하여 루크라로 이동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카투만두 시내 모습 10:00

다행스럽게도 비행 방향의 좌측 창가에 좌석이 배정되어 창밖으로 조망되는 히말라야의 설산군들을 감상하면서 루쿠라로 이동한다.

10:05
10:26
10:28

비행 중에  조망되는 히말라야 설산들

우리가 타고 온 경비행기 10:30

공항에 인접한 Mountain View Lodge에 짐을 내려 놓고 점심 대기 중  루크라 모습을 담는다.

 

이륙하는 비행기 10:58

루크라 시가지 전경10:58
루크라 시내를 배경으로 11:08
루크라 공항은 Tenzing - hIllary(에베레스트 최초등정자 이름) 공항 11:12
Mountain View Lodge 11:17

이 롯지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때에도 이 롯지에서 묵는다.

 

점심 식사는 로스트 치킨, 감자, 야채 11:22
본격적인 트레키을 출발하면서 12:30
루크라 시내를 지나면서 12:37
입장권 구입처 12:47
관광경찰에서 체크인 12:51
네팔 최고의 여성 셰르파 파상 라무를 추모하며 12:53

- 네팔 최고의 여성 셰르파 파상 라무 4년 연속 시도 끝 에베레스트 등정 하산길에 사망

히말라야 자락에 솔루와 쿰부라 불리는 마을이 형성된 지 몇 백 년동안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고산족을 셰르파족이라 부른다. 예부터 셰르파족은 희생정신과 용감성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불리어왔다. 이들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 지척에 있었음에도 몰랐다가 1852년 영국인에 의해 처음 측량이 이루어지며 알게 되었다. 측량대장의 이름을 빌어 에베레스트라 이름 붙은 세계 최고봉을 이들은 사가르마타라고 부른다.

셰르파족은 히말라야를 찾아온 외국인들을 그들이 원하는 지역까지 안내하거나, 여태껏 자신들이 신으로 여겨왔던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하나둘씩 정복을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셰르파족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셰르파 남자들의 역할은 고산등반 가이드로서 외국인 원정대에 고용되어 일정기간 등반을 한 대가로 주 수입원을 삼는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이 집을 장기간 비울 때 엄마로서 자식들을 돌보는 일과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간의 고정관념을 뒤집은 여성이 있다. 여성 셰르파족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녀로 인해 한동안 네팔 전체에 파문이 일었다. 남편과 3명의 자녀를 둔 파상 라무(Pasang Lhamu), 그녀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팔인들조차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과거 세 차례 네팔 여성이 도전한 사례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 사후 네팔 국민영웅 돼

필자는 파상 라무 셰르파를 우연한 기회에 만난 적이 있는데, 첫 인상은 차분하다는 것이었다. 네팔에는 외국인들에게 전문적으로 집을 소개하는 브로커들이 있다. 이들은 집 계약이 성사되면 집주인에게 한 달치의 집값을 소개비 명목으로 받는다. 나는 이사하기 위해 그런 브로커에게 적당한 집 소개를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필자가 나도 산이 좋아 네팔에 오게 됐다고 소개하자 자기도 네팔 여성 산악인임을 강조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셰르파족은 외국 산악인들의 등반 안내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 아쉽다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집안을 둘러보고 있는 필자에게 3층에 있는 큰 방으로 안내했다. 방 벽에는 에베레스트 앞에 그녀가 셰르파 복장을 하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에베레스트를 향한 그녀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집이 길 옆이라 소음과 매연이 심해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헤어질 때 그녀가 한 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네팔 여성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와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93422일 라무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세 번 실패에 이은 네 번째 도전에 올린 개가였다. 그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자 네팔 국민들은 국가 영웅(Rastriya Bibhuti)’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라무가 하산 도중 사다 셰르파와 남봉 근처에서 비박중이라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왔다. 불길한 소식은 얼마 후 불행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시신은 실종된 지 18일만에 같이 등반했던 셰르파들이 발견했다.

당시 상황은 매우 참혹했던 것 같다. 그녀는 8,000m 고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고자 조금이라도 더 숨을 곳을 찾기라도 하듯 남봉 근처의 바위틈 속에 상반신을 묻은 자세로 발견됐다. 함께 비박했을 사다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셰르파들은 수색을 포기하고 파상 라무의 시신만 베이스캠프로 옮겼다. 당시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가 현지에 있었는데, 우리 원정대가 비협조적이었다는 엉뚱한 기사가 네팔 일간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파상 라무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대한 것은 1990년 프랑스원정대 대원으로 참가했을 때다. 당시 프랑스 대원은 8,000m에 도달하기도 전에 고산병으로 인해 등정을 포기해 라무 혼자만 등정을 시도하게 됐다. 그러나 프랑스팀 리더는 대원이기는 하나 네팔 셰르파 여성 혼자만 등정에 나서는 일이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는지 그녀에게 하산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다음해인 1991년 네팔에선 처음으로 셰르파 여성이 대장인 에베레스트등반대가 조직됐다. 물론 대장은 라무였다. 그러나 라무는 이 두번째 등반에서 정상을 불과 100m 남겨둔 8,750m 지점에서 앞을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악화돼 돌아서야 했다. 그녀는 이 때 셰르파 리더인 소남 치링 사다와 함께 남봉까지 내려와 비박한 후 다음날 하산했다.

이듬해인 1992년 세번째로 등반대를 꾸린 그녀는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1년 전 소남 치링 사다와 비박했던 지점에서 다시금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듯 세 해 연속된 시도에서 실패한 그녀는 1993년 네번째 시도에 나섰고, 그토록 갈망하던 에베레스트 정상에 422일 오후 215분 네팔 국기를 꽂았다.

그러나 정상에서 하산하던 중 사다 소남 치링이 8,750m를 지나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파상 라무는 2차 원정 때 비박했던 지점인 남봉에서 소남 치링과 다른 1명의 셰르파와 더불어 비박에 들어갔다. 한 번 살아서 내려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다음날인 423일 동이 트자 셰르파 1명이 C4로 내려왔고, 마침 한국 여성원정대 대원과 셰르파들이 등정을 위해 C4에 올라왔다. 하지만 한국 여성대가 도착한 시각은 이미 오후 3시로, 구조에 나서기는 늦은 시각이었다. 게다가 C3에서 올라가느라 지친 여성대가 곧바로 700m의 고도차가 나는 남봉까지 구조에 나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날씨가 나빠지고 있었다.

한국 여성대원 두 사람은 8,000m 고소는 처음이었다. 때문에 다음날 한국 여성대 셰르파들과 동국대팀 셰르파, 네팔팀 셰르파들이 구조에 나섰으나 강풍과 분설로 인해 8,400m 지점에서 포기했다고 한다.

 - 무전기도 제대로 못 갖추고 등반

이렇게 해서 라무는 죽음을 맞고 말았다. 아니, 첫날 밤 이미 그녀는 숨이 다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여성을 포함, 수많은 사람의 등정을 용납했던 에베레스트는 자신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고 자란 파상 라무만은 끝내 자기 품 속에 품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그녀는 만류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뿌리치고 원정길에 올랐다고 한다.

필자가 분개하는 것은 네팔 관광성의 처사다. 같은 시기에 등반했던 인도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는 입산료를 면제해 주면서 같은 국민인 네팔 여성 등반대에는 입산료 전액을 다 납부하게 했다. 이들의 처사가 훗날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죽은 라무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리 없다.

입산료 전액을 내려다보니 등반경비가 태부족이었고 결국 무전기조차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남편 소남 셰르파의 울부짖던 모습이 선하다. (참조 -월간산 393호 2002.12)

 

고도를 서서히 낮추면서 13:00
티베트 불탑인 초르텐 13:30
곳곳에서 보여지는 마니석 13:34

 

마니석 - 길가나 언덕위에 쌓여있는 티벳문자가 새겨진 돌을 말하는데, 넓은 의미로 라마교의 경전이나 기도문을 크고 작은 바위나 편평하고 넓적한 돌에 새긴 조각들을 말한다. 마니(嘛呢)는 티벳어로서 옴 마니 받메홈6글자의 줄인 말이고, ()은 돌을 뜻하는 한자에서 가져온 말로 티벳어와 중국어가 합쳐진 단어이다.

 

아직까지는 힘들지 않게 이동  13:53
계곡(Dudh koshi nadi)좌측으로 이어지는 등로 14:00
Mudslide Bridge를 지나 14:04
Holiday Inn를 지나  14:22

뒤로 보이는 설산은 Nupia(5,885m) 추정된다.갯(ghat)에는 14시35분에 도착한다.

 

갯(ghat) 마을 전경 14:36
땔감으로 준비된 갈비( 말라서 땅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솔잎 )와 장작 더미 14:41
Chhomolongma Garden Lodge를 지나서 14:42
룽다와 초르텐이 있는 마을을 지나 14:48
마니석을 지나자 타르쵸 14:50
Phading의 Yeti Mountain Home를 지나 15:13

룽다(Lung ta)와 타르초(Darchor)- 오색(----)의 사각천에 만트라나 라마교 경전을 목판으로 찍은 기도깃발(prayer flag)들을 만국기처럼 수평의 줄에 매단 것을 룽다(Lung ta)라 하고, 수직 장대에 매단 것은 타르초(Darchor)라 부른다.

 

Phakding에서의 숙소  Trekker's Lodge & Restaurant 15:44
저녁 메뉴- 토스트, 감자튀김, 셀러드 17:33

 

안나푸르나 트레킹 사진 보기                                                   다음 사진 보기는 여기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