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암벽등반

[스크랩] 개척자,암벽의 발레리노-볼프강 귈리히...

상영신 2010. 3. 2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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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don't stretch,
you don't know where the edge is.
 
시도해보지 않으면
어디가 한계인지 모를 것이다.
 
 
 
오늘 지하철 선반대에서 건진 한국일보에서 읽다 아주 감명을 받은 기사
특히 한겨울 등반 도중 절벽에 매달려 눈을 맞으며 잠을 자고 있는 사진을 보면서는
한참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10일간 바위절벽에 매달려 잠을 자며 등반하기도 했다는 인물.
산을 왜 오르는가라는 질문에 누군가 산이 있기에 오른다고 답했다던가.
 
볼프강 귈리히........세계적인 암벽 등반가
그는 왜 암벽을 올랐을까?
 
암벽 등반 루트도 그 험한 정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고 한번 오른 길 위에
한번도 오르지 못한 길이 상위 등급으로 랭킹된다는 사실...
많은 이들이 다니는 "길"이라는 것이 최초의 누군가가 발자욱을 남긴 후에 생기고
길이라는 이름이 붙는다는 사실
 
 

한국일보 6/22字

 

[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7> 볼프강 귈리히(1960-1992)


아무도 못 가본 바윗길 맨몸으로 돌파
사상 첫 5.14d급‘액션 다이렉트’ 성공
암벽기술 거벽등반에 응용 세계 놀라
32세때 아우토반서 불꽃같은 삶 마쳐


칠레 파타고니아의 파이네(3,050m) 중앙벽을 등반하던 중 비박을 하고 있는 볼프강 귈리히. 그는 한겨울의 이 바위 절벽에 10일간 매달려 잠을 자며 5.12급의 등반을 해냈다.

귈리히가 암벽을 힘차게 오르고 있다.

귈리히가 200m 높이의 수직 절벽 위에 다시 6m 정도 수평 선반처럼 튀어나온 극단적인 오버행을 안전장비 없이 혼자 통과하고 있다.

암벽등반의 루트를 순수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바윗길’이다. 혹자는 묻는다. 바위에도 길이 있느냐?. 바위꾼들은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원래부터 길이 나 있던 곳도 있는가? 태초의 세상에 길이 있었을 리 없다. 길이란 인간이 다니면서 생겨난 것이다. 바윗길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오르지 않았을 때 그곳에는 길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처음 그곳에 오르면 길이 생겨난다. 이름하여 바윗길이다.

 

이 바윗길에는 난이도의 등급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즉 쉬운 바윗길과 어려운 바윗길이 있는 것이다. 미국 요세미테에서 기안되어 현재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등반 난이도의 등급은 이 세상의 모든 길을 다섯 등급으로 나눈다. 1급은 손이나 발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하이킹 루트다. 2급은 가끔 손을 써야 하는 길, 3급은 손을 자주 써야 하는 길, 4급은 추락시 위험에 처하게 되는 길이다. 아주 간단한 암릉등반 루트라면 4급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일을 사용해야 하는 본격적인 암벽등반 루트는 5급에 해당한다.
 

이 5급은 다시 5.0에서 5.9까지 10단계로 나뉜다. 암벽등반 기술이 없는 사람도 오를 수 있다면 5.4 이하로 평가된다. 틈새에 손 끼우기 같이 기본적인 기술이 요하는 길이라면 5.4에서 5.7 정도로 평가한다. 지속적인 훈련과 순간적인 파워 그리고 안전장치의 숙련된 사용이 요구된다면 5.7에서 5.9 정도다. 요컨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바윗길의 난이도를 5.9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록과 한계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법. 어느 날 누군가가 인간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바위를 가리키며 그 난이도를 묻는다. 되돌아올 답변이란 빤하다. “저기는 오를 수 없어.” 그가 다시 묻는다. “만약 올라간다면?” 그리고는 그가 코웃음 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바위에 길을 내고야 만다면? 등급체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바로 5.10이다.
 
세계적인 암벽화 회사로 유명한 ‘파이브텐’이라는 브랜드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5.10이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우리 말로 옮기자면 ‘만점’(滿點)이라고나 해야할듯 하다.
난이도가 5.10을 넘어서면 등급체계는 보다 세분화한다. 5.10이라는 난이도를 다시 a,b,c,d로 나누는 것이다. 5.10급의 난이도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5.10d다. 그렇다면 이것이 궁극의 바윗길인가? 그렇지 않다. 어느 날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5.10d로 평가된 바윗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바위에 길을 내고야 만다. 그러면 그 길은 5.11a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현대 등반의 역사란 어떤 뜻에서 곧 ‘난이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선두에 서서 끝없이 기록을 갱신해나갔던 산악인이 바로 볼프강 귈리히(1960-1992)였다.
 
 

1960년 독일의 팔츠에서 태어난 그가 암벽등반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14세 때였다. 독일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이자 미국 요세미테에서 거벽등반 기술을 수입해온 라인하르트 칼 밑에서 등반기술과 철학을 익힌 그는 에어랑켄 대학에서 스포츠과학을 전공하며 자신만의 등반스타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볼프강 귈리히는 근력을 키우기 위한 섬세하고도 지독한 트레이닝, 자일이나 파트너 없이 저 혼자 절벽과 승부하는 놀라운 담력, 실내 암장에서나 가능할 법한 기술을 극한 상황의 고산에서도 적용시키는 겁 없는 도전 등으로 현대등반사에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다.

귈리히는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바위들을 찾아 전세계를 순례한 떠돌이 철새였다.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 타호 레이크에 있는 ‘그랜드 일류전’(5.13c)에 붙어 벌인 8일간의 사투는 전세계 바위꾼들 사이에 하나의 신화다. 기어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그 바위에 오른 귈리히는 너무 탈진한 나머지 이후 30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잠조차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 요세미테의 ‘세퍼릿 리앨러티’(5.11d)를 하드프리 솔로로 돌파한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는 파트너도 자일도 없이 수직 200m의 바위 절벽을 기어오른 다음 천정처럼 가로막힌 6m의 바위를 거꾸로 매달려 통과한 뒤 그 위로 사뿐히 올라탔다. 널리 알려진 그의 별명 ‘크랙의 발레리나’가 탄생한 것은 이 기념비적 등반을 통해서였다.

전세계 5.13급의 바윗길을 모두 섭렵한 그는 이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바로 5.14급의 바윗길이다. 귈리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독일 프랑켄유라의 ‘액션 다이렉트’다. 145도로 기울어져 있는 길이 12m의 오버행이다. 그는 무려 11일 동안이나 이 바위에 매달려 연구와 훈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새 길을 뚫고야 만다. 오직 손가락 끝만으로 허공에 매달린 채 체공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으로 바삐 몸을 놀려 이 코스를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7초였다. 인류 최초의 5.14d급 난이도의 바윗길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상상해내고 훈련했으며, 끝내 실천에 옮긴 최첨단 암벽등반 기술을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고산 거벽등반에도 적용시켰다. 귈리히가 카라코람의 네임리스타워와 파타고니아의 파이네 중앙탑에서도 5.12급의 고난도 등반을 거침없이 해치웠을 때 세계 등반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이 끝없는 난이도 갱신의 질주는 언제쯤 잦아들 것인가?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그가 ‘인간이 오를 수 없는’ 바위에 오르다가 추락사할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하지만 이 익살맞은 독일 청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바삐 마감했다. 1992년 8월 31일, 볼프강 귈리히는 독일의 무한질주 고속도로 아우토반에서 한껏 엑셀을 밟아대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서른 두 해 동안 타오른 불꽃같은 삶이었다.

 

▲ 현대 암벽등반의 다양한 스타일
추락·휴식 여부따라 4종류… 난이도 못지 않게 중요시
 
현대 암벽등반에서 난이도 못지 않게 중시하는 것은 스타일, 즉 ‘어떤 방식으로 올랐느냐’이다. 루트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등반을 시작하여 첫 번째 시도에서 단 한 번도 추락하지 않고 자유등반으로 오르는 것을 ‘온사이트’(on sight)라고 한다. 이에 비해 한번 이상 경험해본 루트를 추락하지 않고 오르는 것을 ‘레드 포인트’(red point)라고 한다. 등반 시도 중 추락했을 때 내려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오르는 것은 ‘요요잉’(yoyoing)이며, 추락한 지점에 매달려 있다가 다시 오르는 것은 ‘행도깅’(hang dogging)이다.
 

볼프강 귈리히처럼 첨단의 암벽등반가들은 이 등반스타일을 매우 엄격하게 따진다. 1979년 그가 뉴욕 근교 샤왕겅크의 ‘수퍼크랙’(5.12c)을 오른 것은 3일간의 요요잉을 통해서였다. 1987년에 그가 개척한 미국 조슈아트리의 ‘문빔크랙’(5.13b)과 독일 프랑켄유라의 ‘월스트리트’(세계 최초의 5.14b)는 레드 포인트 방식에 의한 등반이었다. 1988년 그가 참가했던 독일 트랑고원정대의 네임리스타워 유고루트의 돌파 방식 역시 레드 포인트였다.

그가 선호했던 ‘자유등반’이란 또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다. 안전장비를 설치하되, 오직 추락시에만 그것에 의탁할 뿐, 등반시에는 전혀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등반방식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확보물을 잡거나 딛지 않을뿐더러, 그것에 매달려 휴식을 취하는 일도 용납하지 않는 등반스타일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독 자유등반’이란 어떠한 안전장비도 사용하지 않고 파트너도 없이 혼자 오르는 스타일이다. 이 경우 추락은 곧 사망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볼프강 귈리히는 요세미테 최난코스들 중의 하나인 ‘세퍼릿 리앨리티’(5.11d)를 바로 이 ‘단독 자유등반’ 스타일로 돌파해냈다.


8일간 사투 끝에 암벽을 정복하고 그 후 30시간동안 아무 음식도 못지 못하고 잠도 못잘 정도로 탈진했던 적도
있다는데.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오를 엄두도 못내는 산 밑의 사람들이 등반의 어려움과 위험을 조금도 모르면서
가타부타 주접을 떨어댄다면......
산이 아니라하더라도 우리 주위에 늘상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최선"이라는 낱말을 항상 입에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도 왜 안될까?"
 
정말 최선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허투로, 자신이 가진 힘의 십분지일도 쏟지 않으면서 신세를 한탄하고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는 사람들에게-대충 사랑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 대충 공부하고 머리를 탓하는 사람,
대충 노력하고 운명을 비관하는 사람,대충 경기하고 상대의 강함에 패인을 돌리는 사람,모든 실패의 원인을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찾는 사람,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기 보다 신에게만 의존하려고만 하는 사람.......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산에 올랐던 이 사람의 生을 견주어본다면 아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갑자기 "진짜가 되려면 목숨을 걸고"라는 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진짜가 되려면 목숨을 걸어라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이광웅의 시 <목숨을 걸고> 全文

 

Wolfgang Gullicl(볼프강 귈리히)
 
1992년 8월 29일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타계할 때까지 세계자유등반계의 선두주자였던 볼프강 귈리히는 수많은 극한 자유등반 루트들을 새롭게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자유등반가들이 그 전에 했었던 많은 어려운 루트들을 대담하게 등반하면서 그의 창조성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많은 등반가들이 자신들의 안마당에서 자동차 차체에 의지해 확보보는 분위기하에 단순히 한 영역만 넓히려 한 반면, 귈리히는 디담하게 돌진하는 단독등반뿐만 아니라 고소에서의 벽등반등을 행하면서 자유등반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그의 힘과 헌신,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그는 자유등반을 변혁시키고 등산의 위대한 전통내에서 보다 확고히 자유등반을 확립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귈리히는 유럽에서 인기있는 등반지들 중 하나인 독일의 슈드프팔즈 지역에서 14세에 자유등반의 묘미를 처음 느꼈다. 독일인으로써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오른 라인하드 칼 같은 그런 유명한 인물의 지도하에 귈리히는 등반을 배웠다. 그와 칼, 그리고 다른 여러 등반가들은 하켄에 의지하지 않고 힘과 인내력, 그리고 기술에 의존하면서 기존의 많은 루트들에서 인공확보물들을 제거했다. 수드프팔즈이 한 시험종목이었던 벨리크랙(5.10b)dptj 1977년에 그가 행한 등반은 자유등반에서의 놀라운 능력을 예언했다.

 

그후 그는 어려운 루트들을 찾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일종의 자유등반 방랑자가 되었다. 그는 1979년에 동독의 샤소니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의 선두 등반가인 번드 아놀드의 지도를 받아 월 오브 선셋(5..11d)과 다이렉트 슈퍼래이티브(5.11d) 같은 고전루트에 성공했다. 그 후 미국으로의 첫 여행을 떠나 뉴욕의 사왕겅크에서 슈퍼크랙(5.12d)을 해냈으며, 서부로 이동하여 요세미테에 있는 포에닉스(5.13a)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집중적인 훈련계획을 실행한 후, 1982년에 되돌아 온 그는 그것을 깨끗이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자유등반 코스로 여겨진 캘리포니아의 슈가로프에 위치한 그랜드 일루젼(5,13c)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8일간의 연속적인 노력끝에 그토록 갈망하던 제 2등을 이루어냈다. 그 등반 후 그는 너무 지쳐 30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먹었으며 잠도 잘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를 재등하면서 경험을 쌓은 귈리히는 자신의 극한루트를 개척하기로 다짐했다. 1984년에 그는 독일의 알트뮤흐탈 지역의 카날 임 류쳄(최초의 5.13d급 루트)을 등반했다. 일년 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면서 아라필래 지역의 멋진 오버행 암장에서 그의 마술을 선보였다. 히즈 쿤크스인더짐 루트는 첫 번째 5.14a 등급이 되었으며, 이스덤 오브 더 보디는 5.13d듣급으로 메겨졌다. 한 번의 짧은 여행에서 호주대륙에서 첫 번째 및 두 번째 어려운 자유등반 류트를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등반급수를 다시 향상시켰던 것이다. 그러한 뛰어난 업적들에 만족하지 않은 그는 더 한층 그의 꿈을 충족시켜줄 훈련기술들응 완성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농구와 체조 같은 운동들에서 착안한 훈련일정에 적용하여 1986년 수년간의 노력에 대한 증거인 궤토 브라스터(5.14a)를 완성했다. 더 한층 열심히 훈련한 그는 소위 불가능하게 보인 루트들에서 생공해냈다.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클라이밍 등반지들 중 하나인 프랑켄유라에서 아주 미완성인 한 선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훈련일정에 돌입했다. 1988년에 그는 세계최초의 5.14b급 루트인 월 스트리트를 선등하여 자유등반계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이후 그 루트는 오직 한번 재등되었다.  극한 자유등반 루트들에 열중하면서도 그는 시간을 내어 1986년에는 요세미테의 세퍼리티 리얼리티(5.11d)같은 어려운 단독자유등반과 1984년에는 동독의 드레스텐에 있는 브로큰 마로(5.12a) 같은 심한 런 아웃 루트들을 단독등반했다. 그러한 등반은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통제력을 요구하였으며 고산에서 그가 자유등반을 행하기 위한 준비에 도움되었다.

 

그는 1988년에 파키스탄에 위치한 그레이트 트랑고 타워의 중앙 필라에서 노르웨이 루트(5.10  A3)를 시도하여 이런 방향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 위협적인 6000피트 직벽의 정상근처에서 악천후가 그와 커트 알버트, 그리고 여러 다른 동료들을 후퇴하도록 강요했으나 며칠간 휴식한 그들은 트랑고 타워의 유고 루트를 공격했다. 그들은 그 루트를 재등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몇몇 피치는 5.12급 정도로 어려운 스물여덟 피치나 되는 거의 모든 구간을 자유등반함으로써 자유등반사에 이정표를 세웠다. 이러한 인상적인 등반들을 행함으로써 귈리히는 심지어 좀 더 위협적인 루트들을 시도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겼다. 그는 그 다음해 트랑고 타워에서 에터날 프레임 이라 불린 신푸트를 개척하기 위해 커트 알버트와 함께 카라코람으로 돌아갔다. 5.12b급 한피치 5.12a급 두 피치, 많은 5.11급 피치들 그리고 몇몇 인공등반 피치 등 스물여덟 피치의 그 루트는 그때까지 등반된 가장 지속적으로 어려운 등반선으로 밝혀졌다.

 

그리고는 1990 - 91년 겨울 심지어 보다 더 도전적인 루트를 시도하기 위해 그는 칠레의 파타고니아로 향했다. 얼음이 박혀있는 크랙들과 끔찍한 기후와 싸우면서 그와 커트 알버트, 번드 아놀드, 노버트 바쯔,그리고 피터 디에트리흐는 파이네 중앙봉의 4300피트 동벽을 공격했다. 서른다섯피치의 루트를 완성하는데 10일이 소요되었는데 다섯 피치의 5.12급 등반과 많은 5.11급 등반들, 그리고 여러 인공등반 피치들로 이루어진 아마도 동시대의 암벽등반들 중 가장 어렵고 모험적인 등반일 것이다. 그들은 아주 어울리게 그 루트를 "폭풍의 기수들"이라 명명했다.

 

고산으로의 여행에 의해 원기를 회복한 그는 극한 자유등반루트들을 위한 훈련에 자신을 몰입시켰다. 이러한 훈련은 1991년 가을 프랑켄유라에서 손가락 끝이 겨우 걸리는 작은 홀드들로 이루어진 짧고 가파른 다이나믹 등반루트인 액션 다이렉트를 등반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우선 5.1`4d급으로 매겨진 액션 다이렉트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극한 자유등반 루트일 것이다. 귈리히는 다시 한번 더 등급을 높여 경이로움을 품게 했던 것이다.

 

액션 다이렉트와 다른 여러 등반들을 통해 귈리히는 등반범위를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유등반 범주내에서 전체적인 새로운 규정을 발전시키면서 자유등반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환경에 적응하고 위험을 극복하는 모험등반의 고전적인 가치들을 자유등반의 신기한 새 분야에 적용시킴으로써 그같이 등반을 실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 분야에서의 진보가 홀드를 깍아내거나 갖다붙여 이루어진건이 아니라 창조성을 통해 자연과 밀접하게 접촉함으로써  이루어졌음을 입증시켰다. 암벽에서 드러났듯 무한대의 자연을 읽을 수 있게 된 귈리히는 동시대 자유등반의 장을 변화시켰으며 이 분야의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했다.

 

독일의 리네 계곡에서 1960년 10월 24일에 태어난 귈리히는 19세에 군에 입대할 때까지 거기서 자랐다. "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 이라 그가 말한 15개월 동안의 군복무를 마친 그는 프랑켄유라 근처의 소도시 모셀스트르로 이사했다. 1991년에 결혼한 그는 부인 안네트와 함께 1992년에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까지 줄곧 거기서 살았다. 그들의 집은 등반정보를 얻기 위해 밤중에도 드나드는 세계 여러 나라 출신의 등반가들과 함께 밤새도록 이렂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지역에서의 많은 자유등반 활동을 위한 일종의 비공식적인 등산본부로서의 역할을 했다. 소나무 숲과 깨끗한 시냇물, 그리고 환상적인 석회암장 등으로 이루어진 목가적인 전경의 프랑켄유라를 나에게 안내여행 시켜준 퀼리히는 그의 푸른 폭스바켄 골프를 주차시키고서 작은 카페로 향했다. 그는 해쇼볕을 쬐면서 누워있는 여러 등반가들과 인사하면서 분수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뒤에선 분수가 부글거리는 가운데 귈리히는 커피와 쵸코렛 케익을 주문했으면 등반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밝히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커다란 이두근의 익살스런 눈웃음을 짓는 친숙하고 열정적인 젊은이였던 귈리히는 자신의 특출한 재능에 대해 겸손을 지키면서 자유등반계의 자기 중심적인 면들을 장난삼아 비꼬면서 즐거워했다.

 

볼프강 귈리히의 등반 동영상 - 요세미티

  등반계의 전설인 볼프강 귈리히의 등반 동영상입니다. 알다시피, 귈리히는 생존시 세계 최초의 5.14d ‘액션 다이렉트’ 루트를 개척한 선구자다. 오래 동안 이 문제를 완등한 사람이 없다가, 불과 수년 전부터 극소수의 클라이머에 Adler, Iker Pou 등에 의해 재등된 바 있습니다. 캠퍼스 보드를 창안하였고, 클리프 행어라는 영화에 론 카욱과 함께 스탤론의 대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이 비디오에는 그와 쿠르트 알베르트가 요세미티 및 몇몇 등반지에서 등반한 모습이 수록되어 있다.
 등반하지 않는 사람은 볼프강 귈리히를 알 수 없다. 그가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으나, 그의 전설은 등반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아직도 매료시킨다



클라이밍 지

shlee 抄譯  

출처 : CLUB NB PRIDE
글쓴이 : 미즈노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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