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둘레길 걷기

용문사와 매봉, 어림호

상영신 2021. 3. 8. 11:19

언제 : 2021. 3. 7

어디서 : 매봉(865.3m 예천)

누구랑 : 송명선, 송진화, 신상영, 홍종길,

 

▼산행코스 : 용문사 주차장-매봉-어림지-용문사 주차장(4.5시간 소요)-초간정(용문면)

 

코로나19가 발생하고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확진자는 400여명을 넘나들고 있다.

초등학교 동기생들과의 정기 산행일이지만 일년 째 산행이 취소되고 가까이 있는 친구들과 매봉을 다녀온다.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용문사 좌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25분 정도 오르면 안부에 닿는다.

이곳 부터는 문경시와 예천군의 경계가 되는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면 매봉이다.

정상에는 분묘가 있고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목 뿐이다.

어림지 방향으로 능선 따라 내려오다가 안봉직전에서 점심을 먹는다.

며칠 따스하였는데 오늘은 손이 시릴 정도로 기온이 낮다.

상부댐(어림호) 근처에 있는 하늘 정원을 거쳐 하늘 정원 전망대에 오른다.

산행에서 조망이 없어 조금 서운했던 기분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도록 사방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갈수기인 탓인지 댐의 수위가 낮다.

안골마을을 거쳐 일주문을 지나 용문사를 둘러본다.

천년고찰 용문사에는 올해 국보 제328호로 승격된 대장전과 운장대를 비롯하여 많은 보물들이 있다.

매봉은 산행지로는 매력이 없다.

경사가 급하지 않고 어려운 등로는 없으나 조망되는 풍경들이 거의 없어 운동 삼아 산행을 한다.

산행 말미에 어림호와 용문사를 구경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돌아 오는 길에 용문면에 있는 초간정도 둘러본다.  

초간정을 관리하시는 분께서 제공해주신 김치전으로 넉넉한 예천 인심을 느껴본다.

삼거리 : 용문주차장(4.4km), 임도(하늘자락공원)2.5km

▼ 어림호(御臨湖)

어림호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 군대와 전투시 이곳 城에 친림하였다는 뜻에서 전래된 어림성의 옛지명을 본따 지어진 명칭이며, 碑文은 예천 출신 草丁 權昌倫 선생의 서체입니다

어림성은 조선 전기까지 선성의 기능을 하였으나 그 후는 방치되어 터 만 남아 있게 된 것을 2002년 8월 정부의 제1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의거 이곳에 한국수력원자력(주)이 국내 단위 기기 최대 용량 400MW급 2기인 예천양수발전소의 상부댐을 2004년부터 2011년 7월까지 건설하여 총 700만톤을 저장할 수 있는 깊고 푸른 湖沼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통일의 염원과 雄飛醴泉의 기상을 드높이기 위해 백두대간 자락의 어림호 주변에 후삼국 통일기의 역사적 자취가 짙게 밴 어림산성을 복원함으로써 그 의의를 더하였으며, 예천군과 지역민이 유치한 예천양수발전소가 지역 경쟁력 강화와 관광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전 직원의 정성을 담이 이 碑를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참조-어림호 비문>

▼ 용문사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10년)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윤장대(보물 684호)를 비롯 성보문화재 10여점이 현존하며, 조선 숙종 때 조성된 목각탱화(보물 89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특히,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참조-용문사 홈페이지>

대장전
국보로 승격된 윤장대와 대장전(윗쪽 사진)

▼ 초간정(草澗亭) -예천 용문면에 위치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 가 세운 것으로 심신을 수양하던 정자이다. 권문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백과사전류인 『대동운부군옥』 20권을 지어 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겨 놓았다.

정자는 조선 선조 15년(1582)에 처음 지었고, 선조 25년(1592) 일어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광해군 4년(1612)에 고쳐 지었지만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생의 원고 등을 보관하기 위해 고종 7년(1870)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 왼쪽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대청마루로 4면에 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으면서 초간정사의 현판이 정자 앞 늪에 파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졌는데, 신기하게도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영롱하여 현판을 잃고 근심하던 종손이 파보았더니 현판이 나왔다고 한다.

초간정은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관광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참조-위키백과>

초간정사(草澗精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