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둘레길 걷기

2018 가은초31 산우회 송년산행

상영신 2018. 12. 4. 11:35

일시 : 2018. 12. 2(일)

장소 : 속리산 세조길

참가자 : 김경식, 김윤동, 김이식, 송진화, 서금숙, 서홍석, 신상영, 이명희, 조정욱, 홍종길(10명)

 

2018년 송년 산행은 경사가 급하지 않아 누구나 참여 가능한 세조길이다.

정이품소나무에서 합류하여 털보식당에 주차시킨 후 법주사를 들러본 뒤 세조길 탐방에 나선다.

잘 조성된 오솔길을 따라 정겹게 이야기 나누면서 느림보 탐방이다.

세심정이 목표이였느나 경사가 가파른 순조대왕태실까지 다녀온다.

털보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고 6년을 이어온 산행이 10년 더 지속되기를 기약하면서 서울. 대구, 가은, 점촌으로 향한다.

 

정이품소나무(천연기념물 제103호) 10:35

법주사 일주문-호서제일가람 11:35

세조길 입구 11:37

속리산 세조길-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요양 차 스승인 신미대사가 있는 복천암으로 순행한 역사적 사실에 착안하여 명명된 2016년8월에 생긴 산책로이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 55호)과 금동대불 

경내 부도탑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법주사 전경

법주사- 사적 제50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 553년에 의신 조사가 창건했으며, 절이름은 불경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776년에 진표가 이 절을 중창했고 그의 제자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왕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개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갖춘 대찰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중창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이 있다.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조- 다음백과)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높이 330cm. 이 석등은 일반형 석등의 간석 부분을 8각기둥 대신 쌍사자로 변화를 준 이형석등이며, 쌍사자석등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지면에 놓인 넓은 8각 지대석의 옆면에는 상하에 테를 두르고 우주를 새겼으며, 윗면 중앙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과 간석을 대신한 쌍사자와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하대석 역시 8각이며 옆면에는 단판의 내림연꽃이 8개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사자 2마리가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을 떠 받치고 있는데 머리와 갈기와 다리 근육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상대석에도 단판의 올림연꽃이 상하로 조각되었으며 연판 안에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얹힌 8각의 화사석에는 4면에 장방형 화창이 있고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8각의 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추녀 끝에 약간의 반전이 있고 내림연꽃이 조각된 정상부에는 보주만 남아 있다. 8각을 기본으로 하면서 간석에 변화를 준 이 석등은 구성이 간결하고 전체 비례가 적당하여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걸작으로 꼽히며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참조-다음 백과)

석련지(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것으로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희구힌 석조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다잔의 굄과 한 츶의 목련대를 더하고 그 위헤 구름 무의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종자주(난간의 짧은 기둥) 형태는 북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 가운데 하나인 중층(重層) 전각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170평, 높이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이다. 위층에 비하여 아래층의 높이가 훨씬 낮아서 탑파와 비슷한 비례를 보이며, 정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았고 좌우 측면의 1칸과 뒷면 가운데 칸에는 따로 외짝문을 달았다.

대웅보전의 양식은 내외 2출목으로 공포를 짜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1층은 내외 2출목이고 2층은 내외 3출목인데, 1층 살미는 수서형, 2층 살미는 앙서형이어서 변화를 보인다. 공간포는 전체적으로 매 칸마다 1구씩 배치되었다. 1층 살미의 수서형은 좀 독특해서 한 번 둔각으로 꺾었으나, 윗면은 사선으로 깎았다. 제3살미는 끝에 솟은 연봉이나 연꽃이 조각되었고, 그 위쪽의 보머리는 주심포 상부에서 4모를 죽인 8각형이고, 간포 상부에는 당초무늬가 초각된 형태이다. 창방머리의 연화당초각(蓮花唐草刻)도 주목된다.

2층의 살미는 제1, 제2살미가 수평에 가까운 기울기로 길게 뻗어 살짝 올린 완만한 곡선형 앙서이고, 제3살미는 끝을 화살 모양으로 뾰족하게 하고 밑면은 둥글게 한 형태의 초각인데, 이 위에 주심포 위에는 끝을 마름모꼴로 마무리한 보머리를 놓았고, 간포 위에는 제3살미와 겹판을 이루면서 머리 부분을 둥글게 한 보머리를 얹었는데 1층에서와 같은 초각은 베풀지 않았다. 한편 공포 위에 3겹 퇴보를 얹고 나서, 퇴보 사이에 낮은 벽(상벽)을 쌓아서 층급을 이룬 다음 벽면을 짧은 동자기둥으로 분할하고 거기에 나한도를 그렸다. 이 상벽 위로 넓은 빗천장을 가설하기 위해 밑면에 연화두식(蓮花頭飾)을 초각한 십자형 받침을 설치하였다. 빗천장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을 그려넣었다. 이러한 구조는 2층 빗천장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내부에는 고주를 놓고, 이 퇴보 위에 2층의 평주를 놓아 금산사의 3층 전각인 미륵전과 같은 수법으로 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가운데에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내부에 모셔진 이 삼신불은 벽암이 중건할 때 조성된 것이다. 삼신불이란 석가모니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하여, 과보(果報)로 나타난 몸[報身]과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 석가모니의 진여(眞如)의 몸[法身], 그리고 중생제도를 위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몸[化身]을 가리킨다(참조-다음백과)

팔상전

팔상전- 국보 제55호. 5층의 높은 건물로 5층 옥개(屋蓋)는 사모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상륜부(相輪部)를 갖춘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이다.

건물은 각 면에 돌계단을 가진 비교적 낮은 석조기단 위에 섰으며,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돌리고 공포의 헛첨차는 기둥머리에 꽂혔다. 공포는 2출목(二出目)으로 출목의 끝은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나, 점차 형태는 조선 말기의 매우 장식적인 파련각(波蓮刻)을 가졌다.

2·3·4층의 공포는 모두가 기둥 위에 놓이기는 하나 다포(多包)집 양식의 공포이며, 5층은 기둥머리와 창방 위에 평방(平枋)을 돌려 완전한 다포집 양식이 되었고, 공포는 주두(柱頭: 대접받침) 위에만 있으나 형태는 역시 다포집 양식의 것이다.

이와 같이 1층은 주심포(柱心包)이고, 2층 이상은 다포집 양식의 포작(包作)은,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나 쌍봉사 대웅전(雙峰寺大雄殿) 등 3층 건물에 있어서도 보지 못하는 특수한 수법이다.

내부 가구는 평면 가운데에 심주(心柱)가 있고 모서리 안쪽에 귀고주[隅高柱]를 세웠으며, 2층의 모서리기둥[隅柱]은 1층 변주(邊柱: 변두리기둥)와 귀고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 세워졌다.

3층 역시 귀고주와 2층 변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 그 기둥을 세우고, 4층 변주는 귀고주가 바로 4층 변주가 된다. 이 귀고주는 심주와 대량(大樑)으로 연결되며, 5층 변주는 이 대들보 위에 서게 되었다. 심주는 기단 윗면 심초(心礎) 위에서 5층 옥개 밑 중도리까지 이른다. 이러한 가구방식은 금산사미륵전의 가구방식과 같은 계통의 수법이다.(참조- 다음백과)

눈썹 바위 12:16

  점심 12:47

목욕소 14:17

목욕소- 세조가 법주사에서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한 대법회를 연 후 복천암을 방문하여 세조가 피부병을 낫기 우해 홀로 목욕을 했던 장소라고 한다. 산책 중 월광태자의 조언을 들은 세조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여 그를 괴롭히던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고  그  이후로 이 곳을 목욕소라 불렀다고 한다

세심절 절구 14:13

손조대왕 태실 14:33

순조대왕태실- 이곳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순조(純祖)의 태실(胎室)이 있는 곳이다. 이 태실은 정조(正祖) 11년(1787)에 만들어진 것이며 그 때 이 산봉우리를 태봉산(胎峰山), 일명 태봉(胎峰)이라고 이름하였다. 태실비는 순조 13년(1813)에 세워진 것인데,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비석 받침인 거북 모양의 귀부(龜跌) 위에 세운 비석(碑石)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음각(陰刻)되어 있다. 난간(欄干) 및 난간동자(欄干童子)는 1982년에 해체하여 보수한 것이다.